한국 기독교계에서 큰 논란이었던 전태일 열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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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10:56
가비슈포댄서
전태일은 보통 노동운동가로만 기억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종교적 정체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묘비에 적힌 문구도 '삼백만근로자대표이자 기독청년 전태일"
그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시위하던 중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고 외쳤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자를 공공연히 혹사하면서도 그들의 인간다운 삶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다.
다만 한 가지, 전태일이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투쟁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목숨을 건 저항이었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
그런데 전태일 사후 그의 죽음이 사회적 화제가 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전태일 열사가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이소선 여사에게 평화시장 업주들이 내건 합의금을 받으라고 종용했다.
전태일과 그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는 자살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의 장례예배는 치른 적이 없었고, 장로교 원칙상 치를 수도 없고, 치러서도 안 됩니다. 이번에 꼭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고 싶다면 내가 알기로는 그 청년이 감리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던데 그 교회에 가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마땅한 원칙입네다"고 오재식 박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은 스스로가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사회가 그를 죽인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도 공모자이기에 우리의 잘못을 참회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재야의 가톨릭&개신교 신자들이 함께 나서 11월 25일 합동추모식을 열었다. 그곳에서 김재준 목사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
“70년대는 바로 이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크리스챤 노동자로서 처절한 밑바닥의 삶과 고통과 투쟁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경험한 그의 죽음은 침체된 노동운동에 있어서 과감한 노조투쟁의 전선으로 많은 노동자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 이상과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학생운동의 민중운동과의 구체적 연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고난과 사회의 모순에 둔감하였던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깨닫게 하여 민중적 신앙혁명운동의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현실 고난에 대해 회개하여 참여하게 한 십자가이었다.” 서울대 총기독학생회, 1984.11.12. |
전태일 열사는 사후 자신의 죽음이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될 것을 직감했는지,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